쓰라린 역사의 자리, 망월동에서 느낀 삶의 무게

오월! 신록의 계절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텔레비전 뉴스에는 지나간 세월의 민주화운동과 또 그들의 상처가 남아있는 광주 망월동묘역이 화면에 나타납니다. 나는 망월동묘지가 화면에 나타날 때마다 십여 년 전에 친구들과 함께 여행 중 그곳에 다녀온 기억이 떠올라 ‘아직도 내가 그 시절을 잊지 않고 살아 있구나’라는 감회에 젖게 됩니다.
그 때가 두 번째로 전국여행을 떠났던 88년도로 기억이 됩니다. 우리는 이 시절에 감동 있게 보았던 영화 ‘디어헌터’의 친구들끼리의 여행을 흉내내듯 작당하여 신정 연휴기간 동안 승합차를 이용한 전국여행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전 해인 87년에도 역시 연말연휴를 이용하여 3박 4일의 짧은 기간이지만 죽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하였던 것이 큰 즐거움으로 남아서 그 다음해인 88년에도 똑같은 코스로 돌기로 하고 전해에 못 가본 망월동묘역을 이번에는 들려 보기로 계획을 잡아보았습니다.
연말 31일 저녁에 출발하여 영동고속도로를 넘기로 했습니다. 강릉 경포대에서 새해 일출을 맞이하고 수산시장에서 유명한 알탕을 한 그릇씩 먹고 남쪽으로 남쪽으로 차를 몰았습니다. 같이 행동한 다섯 명의 친구들 중에는 한 명만이 결혼을 하였고, 나머지는 총각인 상태였기 때문에 자유스러운 분위기였습니다. 노래도 부르며 처녀들끼리 여행 온 팀과 잘 엮어졌으면 좋겠다는 농담도 하며 들떠 있었습니다. 그 시절에는 우리나라의 경제가 발전하고 차량이 크게 늘어나게 된 계기인 올림픽이 치러지기 전으로 도로에는 차량이 많지 않았고 오히려 신정연휴 때는 이동이 적었던 것으로 기억이 됩니다. 왼쪽으로 바다가 이어지는 고속도로를 따라서 울진 성류굴을 들렀고, 영덕을 지나 강구항에서는 비싼 영덕 게는 구경만 하고 홍게만 길가 좌판에서 뜯던 기억이 납니다.
부산에 도착해서는 부산시내를 통과하여 태종대. 광안리, 자갈치시장 등을 돌아다니던 추억이 아련합니다. 2일째 되는 날은 남해와 진주 등 남녘의 따뜻한 바람을 흠뻑 맞았고, 마지막 날은 승주 송광사를 들른 후 광주에서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아침 일찍 일어난 우리는 망월동을 찾아가기 위하여 새벽 여명에 출발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묵었던 여관주인에게 위치를 잘 설명 듣고 출발했는데 생각보다도 묘역이 광주 외곽에 있는데다가 을씨년스러운 풍경이었습니다. 논 한가운데로 황토길이 펼쳐진 변두리 중에 변두리였고, 아침 햇살이 군데군데 살얼음이 언 논바닥에 퍼져 있었습니다. 조금을 가다보니 아무 인기척이 없을 묘역으로 가는 길에 아가씨 한 명이 차오는 소리를 듣고 손을 흔들며 세워달라고 하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웬 이른 아침에 공동묘지에 여자냐’며 장난기가 발동해서 차를 세웠습니다. 수더분하게 생긴 이십대 초반의 아가씨는 조금 추운 듯이 귀를 손으로 감싸며 우리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어왔습니다. 우리는 망월동묘지로 간다고 들떠서 대답을 하였고 그 아가씨는 자기도 ‘그 쪽 방향인데 좀 태워줄 수 없느냐’고 물어왔습니다. 그렇게 하여 같이 합승을 하게 되었는데 분위기가 어색했는지 그 아가씨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묘역에 혹시 아시는 분이라도 계세요?” 우리는 신정연휴에 여행을 왔다가 망월동에 들려야 한다는 생각에 이곳을 찾게 되었다고 설명하였고, 그때쯤 묘역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아가씨는 내리면서 “저는 여기 묘역 입구에 있는 비닐하우스 화원에서 일하고 있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차에서 내려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았지만 너무나 황량하고 이름 모를 시골의 공동묘지 분위기에 조금은 서글펐습니다. 우리를 더욱 황당하게 만든 것은 망월동묘역에 대한 설명 입간판이 뽑힌 채로 거꾸로 처박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가 아무리 노태우 대통령 시절이었다고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바로 이때 화원 하우스 문을 열고 조금전의 그 아가씨가 하얀색 초장전지에 싸인 국화 한 다발을 안고 우리를 불렀습니다. 친구 중에서 누군가가 “우리는 꽃이 필요 없는데...”라고 말꼬리를 흐렸을 때 그 아가씨는 당황한 듯이 ‘이것은 팔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가지고 가셨으면 하는 것’이라고 말을 하며 수줍은 듯이 고개를 숙였습니다. 우리는 필요 없었다고 한 이야기가 겸연쩍고 미안했습니다. 그 아가씨는 또 분위기를 파악했는지 “올라가셔서 가장 가슴에 남는 분 묘지에 드리세요”라고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는 진심으로 감사함을 표하며 그 꽃을 받았습니다.
나열되어 있는 묘지 석상에는 그리운 사람들이 다녀간 흔적들이 여기저기 남겨져 있었습니다. 또 영정사진들이 놓여있는 묘도 많았는데 표정이 없는 흑백사진이 겨울 날씨 탓인지 더욱 추워 보였고, 죽음을 당한 그 당시의 상황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낯익은 전남대 총학생장이였던 박관현군의 묘와 6월 항쟁에 기폭제였던 이한열군의 묘도 보며 묘비 뒷면에 있는 비문들의 가슴 사무치는 글을 읽었습니다. 나와 친구들은 광주민주항쟁 당시에 스무 살, 대학 1~2학년 시절이었지만, 이들이 죽어가고 이 곳에 묻힐 때까지 얼마나 이들과 함께 하였는가를 생각하면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친구들은 운동권에는 전혀 관계가 없었고 그저 시국이 불안한 것에만 걱정을 했던 그런 부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듯한 묘 앞에 꽃을 내려놓고 말없이 언덕에 잠시 앉아 있다가 서울로 출발했습니다. 
우리는 남을 위해서 얼마나 희생을 감수하며 살았고, 도 그 낯선 아가씨와 같이, 지역의 아픔을 잊지 않고 회상하고 찾아 온 사람들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넉넉함이 있는지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일은 내 가슴속에 오랫동안 남아 있는 영원히 탈고 안 될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같이 여행을 떠났던 친구 중에 한 명이 지난달에, 가족을 모두 데리고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로 이민을 떠났습니다. 친구들끼리 모여 송별의 자리를 마련하였을 때 화제는 자연스럽게 악동 시절의 이야기로 돌아갔습니다. 함께 슬픔과 기쁨을 나누던 중 한 친구가 우리가 같이 다녔던 여행 중에 망월동 이야기를 하였고 얼굴은 기억할 수 없지만 우리에게 꽃을 건네주던 아가씨의 이미지가 뇌리에 깊게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하였고, 그때의 느낌을 나만이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음 알게되었습니다.
오월 중순에 빛고을의 아픈 이야기가 방영되는 화면에서 이제는 깨끗이 포장이 되고, 단장된 묘역을 볼 때마다 10여 년 전의 겨울을 생각하게 됩니다. 강산이 두 번 바뀌는 세월이 흘러 광주의 아픔도 많이 잊혀지기도 하고 회복되기도 했지만 내 마음 속의 망월동은 스산함과 아침햇살이 비추는 황토논길, 그리고 수줍은 듯이 외지 총각들에게 꽃을 전해주던 아가씨의 모습은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목록보기